핏케언 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몇 년 전 이 섬 남자들이 그 섬의 미성년 여성에 대해 강간 및 성추행을 저질러서 뉴질랜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해외토픽 때문이었다.
그래서 핏케언 섬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다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핏케언 제도(영어:Pitcairn Islands, 노폴크어:Pitkern Ailen)는 남태평양 상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 중 하나이다. 전부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동쪽의 듀시섬으로부터 가장 서쪽의 오에노섬까지 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그 중간에 다섯 섬이 산재해 있는 형태이다. 핏케언 섬 이외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또 이 섬 주위의 300㎞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없다. 공항은 없어서 시설을 갖춘 병원에 가려면 4000㎞ 떨어져 있는 뉴질랜드까지 배로 가야 한다. 그 외에도 정기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급한 경우에는 배를 빌려서 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섬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영화로도 유명한 "바운티호의 반란" 이 계기가 되었다. 현재 핏케언 섬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바운티호의 반란에 참여했던 수병들의 자손들이다.from [핏케언 제도]
18세기 후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이용하여 북미대륙에 이어 칼리브해 서인도제도의 개척도 추진하고 있었으나 미국 독립전쟁으로 서인도제도의 식량공급이 끊기고 만다. 그래서 영국이 착안을 한 것이 [빵나무]였다. 이 나무 열매는 구우면 빵과 비슷한 맛이 된다고 한다. 이 빵나무를 남태평양에서 서인도제도까지 옮겨다 심으면 식량문제는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영국 해군의 바운티호에 빵나무 수송작전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1787년 영국을 출항한 바운티호는 2년후 타히티에서 빵나무를 싣고 서인도제도로 향했으나 선상에서 수병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하여 브라이선장과 그의 편을 듯 18명의 승무원은 소형보트로 추방당한다. 반란의 원인은 수병들이 타이히티의 여자를 잊지 못해서라든가 빵나무에 줄 물 때문에 물배급이 제한되었다든가 선장이 지나치게 엄격했었다는 등의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추방당한 브라이 선장은 48일간의 표류 후 56000km떨어진 네델란드령 인도의 서티모르(현 인도네시아) 에 도착하여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하지만 다른 배의 선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또다시 반란을 당했고 호주 지방총독이 되어서도 반란을 당해서 2년간 감금당하기도 했다. 영국 출항 시 나이가 34살이라서 '어린 것이 건방지게..' 라는 반감을 샀을 거라 추측한다.
한편 반란을 일으킨 수병은 곧바로 타히티 섬으로 돌아갔으나 당시 수병의 반란은 곧 사형이었다. 그래서 주모자 크리스챤이 이끄는 9명은 타히티 여자 12명, 남자 6명, 닭과 돼지, 고구마 등을 바운티호에 싣고 추적의 손을 벗어나 사람들이 모르는 섬으로 도망을 갔다. 타히티에 남은 16명은 용병이 되었으나 91년 영국에서 온 전함에 체포되어 영국에서 사형당했다.
타히티를 탈출한 크리스챤 일행은 핏케언섬에 상륙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배를 태웠다. 그 후 자급자족의 생활이 되었으나 여자를 두고 문제가 생겨 노예같은 대우를 받은 타히티인이 해병을 죽이고, 해병이 타히티 남자를 죽이고, 이번엔 해병끼리 죽이는 말 그대로의 서바이벌 생활을 맞게 되었다. 도망을 칠려고 해도 배는 이미 태워버린 후였다. 18년 후 미국의 포경선이 방문했을때 살아있던 사람은 여자 10명, 어린아이 23명 그리고 남자는 죤 아담스 1명뿐이었다.
미국은 그 섬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1814년 이 섬을 방문하게된 영국 배가 바운티호 반란자들의 섬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담스는 1825년 국왕의 사면조치를 받고 29년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섬은 크레올이라는 영어를 기초로 한 타히티어가 혼합된 언어를 사용했다. 10년이상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담스 1명 뿐이었음에도 섬에 있는 유일한 책인 성경으로 아담스가 읽기와 쓰기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영국에 의한 재발견 후 핏케언섬은 호주와 미국을 잇는 배가 방문하게 되어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생활은 끝났다. 영국 교회로부터 일용품 등의 물자를 공급받게 되었지만 불편한 생활과 물 부족을 걱정한 아담스는 도민들이 호주로 이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를 했다. 1831년 영국은 군함을 파견하여 섬주민 전원을 타히티로 옮겼으나 핏케언섬에 자란 사람이 외부환경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어 여러 명 쓰러져나가자 반 년 후 다시 핏케언 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가 다시 100명을 넘어가자 또다시 물 부족과 토지부족이 심각해져서 56년 194명 전원이 선례를 교훈삼아 이번엔 같은 무인도인 노포크섬(현 호주령)으로 이주했다. 노포크섬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했으나 고향에 대한 향수로 58년에서 64년에 걸쳐 6가구가 핏케언섬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5000km떨어진 노포크섬에서도 같은 쿠레올어를 사용하고 있다.
핏케언섬사람은 농업과 어업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면서 섬에 들른 배에 식량과 물을 팔고 일용품을 구입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윽고 비행기의 시대가 도래하고 배도 대형화 고속화가 진행되어 섬에 들르는 배가 줄어들게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수집가들에게 파는 오리지널 우표를 발행하여 수익을 얻게 되었다. 우표매상이 줄어든 현재엔 인터넷 독자도메인 pn을 팔고 있다.
섬에는 영국 정부기관은 없고 피지총독이 관할했으나 1970년 피지가 독립함으로서 뉴질랜드에 주재하는 영국 고등변무관이 핏케언총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도민이 정부에 볼일이 생기면 외국인 뉴질랜드로 가야하는 기묘한 모양이 되었는데 같은 영연방으로 비자는 필요없고 섬 밖으로 가는 것은 뉴질랜드 화물선밖에 없기 때문에 도민으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실제로 주민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돈을 벌기위해 뉴질랜드를 의지하고 살아왔다. 그대로 이주해버리는 사람도 생겨서 인구는 1937년 233명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68년엔 76명, 96년에는 58명, 현재 45명만이 남게 되었다. 또한 출산도 대부분 뉴질랜드 병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뉴질랜드 거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일조했다.
여기까지가 핏케언 섬의 역사이다.
다만 뉴스에 따르면 1999년 영국 여경이 연수로 섬을 방문했을 때 섬의 성인남성 대부분이 과거 40년에 걸쳐 14세 이하의 여성과 성행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사결과 강간과 성추행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재판은 같은 영연방인 뉴질랜드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에 주민들은 맹렬히 반발하고 있다. 또한 성에 조숙한 폴리네시아적인 풍속이라고 주장하며 뉴질랜드나 영국 기준으로 재판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남성들에 실형이 내려지면 곧바로 어업은 불가능하게 되고 화물선과 섬간 왕래하는 교역도 불가능하게 되어 결국 여성과 어린이들도 섬을 떠나야 한다. 핏케언섬의 역사가 끝날 위기가가 닥친 것이다. 이곳에서 연구활동을 하는 미국학자는 UN에 독립선언을 해버린다면 해결되지 않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